자크 시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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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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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제3대제4대제5대
쥘 그레비사디 카르노
제6대제7대제8대제9대
펠릭스 포르에밀 루베
제10대제11대제12대제13대
폴 데샤넬
제14대제15대
폴 두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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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제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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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골
제22대제23대제24대제25대
자크 시라크
프랑크 · 서프랑크 · 카페 · 발루아 · 부르봉
제1공화국 · 7월 왕정 · 프랑스인의 황제 ·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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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봉 왕정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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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제2대제3대제4대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아르망에마뉘엘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장조제프 데솔엘리 드카스
(제2대)제5대제6대제7대
아르망에마뉘엘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조제프 드 빌리에장바티스트 실베르 게 드 마르티냐크쥘 드 폴리냐크
제8대
카지미르루이빅투르니앙 드 로슈슈아르 드 모르트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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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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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제10대제11대제12대
자크 라피트카지미르 페리에니콜라 장드듀 술트에티엔 모리스 제라르
제13대제14대제7대제16대
위그베르나르 마레에두아르 모르티에빅토르 드 브로이아돌프 티에르
제17대(제11대)(제16대)(제11대)
마티외 몰레니콜라 장드듀 술트아돌프 티에르니콜라 장드듀 술트
제18대(제17대)
프랑수아 기조마티외 몰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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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제20대제21대제22대
자크 샤를 뒤퐁 드 뢰르프랑수아 아라고루이외젠 카베냐크오딜롱 바로
제23대제24대
알퐁스 앙리 도풀레옹 포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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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대제26대
에밀 올리비에샤를 쿠쟁몽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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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제28대제29대제30대
루이 쥘 트로쉬쥘 아르망 뒤포르알베르 드 브로이에르네스트 쿠르토 드 시셰
제31대(제28대)제32대(제29대)
루이 뷔페쥘 아르망 뒤포르쥘 시몽알베르 드 브로이
제33대(제28대)제34대제35대
가에탕 드 로슈부에쥘 아르망 뒤포르기욤 워딩턴샤를 드 프레이시네
제36대제37대(제35대)제38대
쥘 페리레옹 강베타샤를 드 프레이시네샤를 뒤클레르
제39대(제36대)제40대(제35대)
아르망 팔리에르쥘 페리앙리 브리송샤를 드 프레이시네
제41대제42대제43대제44대
르네 고블레모리스 르비에피에르 티라르샤를 플로케
(제43대)(제35대)제45대제46대
피에르 티라르샤를 드 프레이시네에밀 루베알렉상드르 리보
제47대제48대(제47대)(제46대)
샤를 뒤피장 카지미르페리에샤를 뒤피알렉상드르 리보
제49대제50대(제40대)(제47대)
레옹 부르주아쥘 멜린앙리 브리송샤를 뒤피
제51대제52대(제42대)제53대
피에르 발데크루소에밀 콩브모리스 루비에페르디낭 사리앵
제54대제55대제56대제57대
조르주 클레망소아리스티드 브리앙에르네스트 모니조제프 카요
제58대(제55대)제59대제60대
레몽 푸앵카레아리스티드 브리앙루이 바르투가스통 두메르그
(제46대)제61대(제55대)(제46대)
알렉상드르 리보르네 비비아니아리스티드 브리앙알렉상드르 리보
제62대(제54대)제63대제64대
폴 팽르베조르주 클레망소알렉상드르 밀랑조르주 레이그
(제55대)(제58대)제65대제66대
아리스티드 브리앙레몽 푸앵카레프레데리크 프랑수아마르시알에두아르 에리오
(제62대)(제55대)(제66대)(제58대)
폴 팽르베아리스티드 브리앙에두아르 에리오레몽 푸앵카레
(제55대)제67대제68대(제67대)
아리스티드 브리앙앙드레 타르디외카미유 쇼탕앙드레 타르디외
제69대제70대(제67대)(제66대)
테오도르 스테그피에르 라발앙드레 타르디외에두아르 에리오
제71대제72대제73대(제68대)
조제프 폴봉쿠르에두아르 달라디에알베르 사로카미유 쇼탕
(제72대)(제60대)제74대제75대
에두아르 달라디에가스통 두메르그피에르에티엔 플랑댕페르낭 부아송
(제70대)(제73대)제76대(제68대)
피에르 라발알베르 사로레옹 블룸카미유 쇼탕
(제76대)(제72대)제77대제78대
레옹 블룸에두아르 달라디에폴 레노필리프 페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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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라발피에르에티엔 플랑댕프랑수아 다를랑피에르 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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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대제81대제82대(제76대)
샤를 드골펠릭스 구앵조르주 비도레옹 블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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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대제84대제85대(제84대)
폴 라마디에로베르 슈만앙드레 마리로베르 슈만
제86대제87대(제86대)제88대
앙리 쾨유조르주 비도앙리 쾨유르네 플레뱅
(제86대)(제88대)제89대제90대
앙리 쾨유르네 플레뱅에드가르 포르앙투안 피네
제91대제92대제93대(제89대)
르네 마예르조제프 라니엘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에드가르 포르
제94대제95대제96대제97대
기 몰레모리스 부르제스모누리펠릭스 가야르피에르 플림랭
(제80대)
샤를 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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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대제99대제100대제101대
미셸 드브레조르주 퐁피두모리스 쿠브 드뮈르빌자크 샤방델마스
제102대제103대제104대제105대
피에르 메스메르자크 시라크레몽 바르피에르 모루아
제106대(제103대)제107대제108대
로랑 파비위스자크 시라크미셸 로카르에디트 크레송
제109대제110대제111대제112대
피에르 베레고부아에두아르 발라뒤르알랭 쥐페리오넬 조스팽
제113대제114대제115대제116대
장피에르 라파랭도미니크 드빌팽프랑수아 피용장마르크 에로
제117대제118대제119대제120대
마뉘엘 발스베르나르 카즈뇌브에두아르 필리프장 카스텍스
제121대
엘리자베트 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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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콜뤼슈
6위7위8위9위10위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16위17위18위19위20위
장 가방
21위22위23위24위25위
26위27위28위29위30위
엠마뉘엘 수녀
장 물랭
31위32위33위34위35위
볼테르
36위37위38위39위40위
크리스찬 카브롤
쥘 페리
루이 뤼미에르
41위42위43위44위45위
샤를 트르네
미셸 사르두
46위47위48위49위50위
하룬 타지프
에리크 타바를리
51위52위53위54위55위
다비드 두이예
앙리 살바도르
쟝 자끄 골드만
56위57위58위59위60위
야니크 노아
달리다
레옹 지트론
니콜라스 윌로
61위62위63위64위65위
시몬 베유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
프랑시스 카브렐
66위67위68위69위70위
71위72위73위74위75위
르노
베르나르 쿠슈네르
76위77위78위79위80위
미셸 세로
미셸 드러커
라이무
81위82위83위84위85위
레이먼드 풀리도르
86위87위88위89위90위
질베르 베코
조제 보베
장 페라
리오넬 조스팽
91위92위93위94위95위
뤽 베송
티노 로시
96위97위98위99위100위
세르지 레기아니
프랑수아즈 돌토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한국인 [ 펼치기 · 접기 ]
상훈 연도결정일수여일이름직책국적비고
1949년8월 15일이승만대통령대한민국
1960년8월 13일윤보선대통령대한민국
1963년12월 5일12월 17일박정희대통령대한민국
1967년6월 23일육영수영부인대한민국
1979년12월 7일최규하대통령대한민국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1979년12월 7일홍기영부인대한민국
1980년8월 29일8월 29일전두환대통령대한민국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0년8월 29일8월 29일이순자영부인대한민국
1988년2월 24일2월 25일노태우대통령대한민국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8년2월 24일2월 25일김옥숙영부인대한민국
1993년2월 11일2월 23일김영삼대통령대한민국
1993년2월 11일2월 23일손명순영부인대한민국
1998년2월 17일2월 25일김대중대통령대한민국
1998년2월 17일2월 25일이희호영부인대한민국
2008년1월 28일노무현대통령대한민국
2008년1월 28일권양숙영부인대한민국
2013년2월 12일이명박대통령대한민국
2013년2월 12일김윤옥영부인대한민국
2013년2월 19일박근혜대통령대한민국
외국인 [ 펼치기 · 접기 ]
상훈 연도결정일수여일이름직책국적비고
1964년12월 3일12월 8일하인리히 뤼프케대통령독일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4년12월 3일12월 8일빌헬미네 뤼브케영부인독일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6년2월 1일2월 7일이스마일 나시루딘국왕말레이시아
1966년2월 1일2월 7일틍쿠 인탄 자하라왕비말레이시아
1966년2월 1일2월 10일푸미폰 아둔야뎃국왕태국
1966년2월 1일2월 10일시리낏 끼띠야콘왕비태국
1966년2월 1일2월 15일장제스총통중화민국
1968년5월 10일5월 18일하일레 셀라시에황제에티오피아
1969년5월 23일5월 27일응우옌반티에우총통남베트남
1969년5월 23일5월 27일응우옌티마이아인제1부인남베트남
1969년10월 28일10월 28일하마니 디오리대통령니제르
1969년10월 28일10월 28일아이샤 디오리영부인니제르
1970년9월 25일9월 28일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대통령엘살바도르
1970년9월 25일9월 28일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영부인엘살바도르
1975년6월 27일7월 5일오마르 봉고대통령가봉
1975년6월 27일7월 5일조세핀 봉고영부인가봉
1979년4월 17일4월 23일레오폴 세다르 상고르대통령세네갈
1979년4월 17일4월 23일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영부인세네갈
1980년5월 11일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국왕사우디아라비아
1980년5월 14일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국왕쿠웨이트
1981년6월 25일수하르토대통령인도네시아
1981년6월 25일시티 하티나영부인인도네시아
1981년6월 29일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국왕말레이시아
1981년6월 29일틍쿠 아프잔왕비말레이시아
1981년7월 6일페르디난드 마르코스대통령필리핀
1981년7월 6일이멜다 마르코스영부인필리핀
1981년10월 13일로드리고 카라소대통령코스타리카
1981년10월 13일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영부인코스타리카
1982년5월 10일사무엘 도국가원수라이베리아
1982년6월 7일모부투 세세 세코대통령자이르
1982년6월 7일보비 라다와영부인자이르
1982년8월 25일압두 디우프대통령세네갈
1982년12월 21일케난 에브렌대통령터키
1983년3월 10일3월 15일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대통령수단
1983년3월 10일3월 15일부띠나 칼릴 압불핫산영부인수단
1983년9월 10일후세인 1세국왕요르단
1983년9월 10일누르왕비요르단
1984년4월 9일하사날 볼키아국왕브루나이
1984년4월 21일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국왕카타르
1984년8월 30일9월 13일다우다 자와라대통령감비아
1984년8월 30일9월 13일치렐 자와라영부인감비아
1985년5월 17일무함마드 지아울하크대통령파키스탄
1985년5월 20일루이스 알베르토 몽헤대통령코스타리카
1986년9월 4일4월 10일엘리자베스 2세국왕영국
1986년9월 4일4월 16일보두앵국왕벨기에
1987년4월 7일아메드 압달라대통령코모로
1988년11월 3일이스칸다르국왕말레이시아
1988년11월 3일자나리아왕비말레이시아
1989년11월 3일11월 20일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대통령서독
1989년11월 3일11월 30일프랑수아 미테랑대통령프랑스
1989년11월 3일11월 30일다니엘 미테랑영부인프랑스
1990년6월 21일안드레스 로드리게스대통령파라과이
1990년11월 5일괸츠 아르파드대통령헝가리
1991년9월 13일아즐란 샤국왕말레이시아
1991년9월 13일투안쿠 바이눈왕비말레이시아
1991년9월 25일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대통령멕시코
1992년8월 13일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대통령과테말라
1993년5월 20일5월 25일피델 발데즈 라모스대통령필리핀
1993년5월 20일5월 25일이멜리타 마르띠네즈 라모스영부인필리핀
1994년11월 7일11월 21일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대통령칠레
1994년12월 5일12월 9일레흐 바웬사대통령폴란드
1995년2월 7일2월 16일이슬람 카리모프대통령우즈베키스탄
1995년2월 21일3월 6일로만 헤어초크대통령독일
1995년3월 28일4월 3일젤류 미테프 젤레프대통령불가리아
1995년6월 26일7월 7일넬슨 만델라대통령남아프리카 공화국
1995년9월 26일9월 29일카를로스 메넴대통령아르헨티나
1996년7월 23일9월 4일알바로 아르수대통령과테말라
1996년7월 23일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대통령브라질
1996년10월 8일10월 20일후안 카를로스 1세국왕스페인
1996년10월 8일10월 20일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왕비스페인
1996년11월 26일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국왕말레이시아
1996년12월 10일12월 15일레오니드 쿠치마대통령우크라이나
2000년2월 22일3월 3일카를로 아첼리오 참피대통령이탈리아
2000년2월 22일3월 6일자크 시라크대통령프랑스
2006년3월 12일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대통령알제리
2007년3월 26일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국왕쿠웨이트
2007년3월 28일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국왕카타르
2009년5월 13일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대통령카자흐스탄
2009년11월 12일알란 가르시아대통령페루
2012년5월 30일칼 16세 구스타프국왕스웨덴
2012년11월 21일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대통령아랍에미리트
2018년10월 8일에마뉘엘 마크롱대통령프랑스
2019년하랄 5세국왕노르웨이
2021년6월 14일알렉산더 판데어벨렌대통령오스트리아
2021년6월 16일펠리페 6세국왕스페인
2021년6월 16일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왕비스페인
2021년8월 25일이반 두케대통령콜롬비아
2021년9월 21일보루트 파호르대통령슬로베니아






프랑스 공화국 제22대 대통령
자크 르네 시라크
Jacques René Chirac
파일:자크 시라크 대통령.jpg
출생1932년 11월 29일
프랑스 파리 5구
사망2019년 9월 26일 (향년 86세)
프랑스 파리 6구
재임기간제84대 총리
1974년 5월 27일 ~ 1976년 8월 25일 1기
1986년 3월 20일 ~ 1988년 5월 10일 2기[1]
제22대 대통령[2]
1995년 5월 17일 ~ 2007년 5월 15일
서명파일:자크 시라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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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아버지 벨 시라크[1]
어머니 마리 루이스 발렛
배우자베르나데트 시라크
자녀슬하 3녀
학력루이르그랑 고등학교 (졸업)
리세 루이르그랑 (프레파과정 / 학사)
시앙스포 (경제지리학 / M.A.)
국립행정학교 (졸업)
종교가톨릭 (세례명:야고보)
신체189cm
의원 선수6
의원 대수3, 4, 5, 6, 7, 8
[1] 1898 ~ 1968.

1. 개요
2. 생애
2.1. 사망
3. 기타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프랑스의 제22대 대통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1995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2년 재선에 성공하여 2007년까지 임기를 수행했다. 특이사항으로 재선 당시 프랑스 역사상 최다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그 속사정은 후술.

그랑제콜파리 정치대학(시앙스포 Sciences Po) (프랑스어:Institut d'Etudes Politiques de Paris)와 국립행정학교(에나 ENA) (프랑스어: 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을 졸업하고 고급공무원을 거쳐서 정계에 입문하였다.[3] 이후 농림부장관, 총리, 파리시장 등 다양한 요직을 거쳐 마침내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다.

2. 생애[편집]


파리에서 은행원의 아들로 태어나 1954년 파리 정치대학(시앙스포 Sciences Po)를 졸업하였다.

특이하게도 대학 시절에 공산당에 가입했었으며 공산당 기관지인 '뤼마니테'의 가두홍보원으로 일한 전력이 있었다.[4] 그래서 미국에 첫 방문을 했을때에는 까다로운 심문을 거치는 곤욕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조르주 퐁피두의 눈에 들어 비서실장이 되고나서는 공산당을 탈당했고 1967년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된 이후로는 우파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한때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면서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칭하기도 하였다.[5]

풍피두가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농민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장관으로 이름 날린다. 이 유명세로 1974년 대선에 출마했지만 4위에 그쳤다.

낙선 후 총리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는 2기 총리 재임기 때와 다르게 진보적인 정책을 다수 도입했다. 그러나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과의 갈등으로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1977년 지방선거에서 전국적으로 사회당과 공산당이 압승을 거두고 우파가 죽을 쑤는 가운데,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의 친구인 미셸 도르나노를 제치고 첫 직선 파리시장[6]에 당선되었다.

1986년 총선 승리로 프랑스 제5공화국 최초로 동거정부 총리가 되어 처음으로 내정에 실권을 가진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는데, 비슷한 시기에 민영화를 남발했던 마가렛 대처도 못한 공영방송을 민영화하는 등 극단적인 우파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와[7] 지지율이 엄청나게 떨어졌고, 1988년 대선에서 좌파 후보 프랑수아 미테랑한테 대패하였다.[8]

이후 와신상담을 노리다가 1995년 대선에서 같은 우파였던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를 제치고 2위(1위는 프랑스 사회당리오넬 조스팽)를 차지하면서 결선투표에 진출하였고, 2차 선거에서 예상보다는 득표차가 적게 나왔지만 좌파의 대표 조스팽 후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경기침체로 지지율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샤를 드 골처럼 분위기 반전을 위해 1997년에 조기총선을 실시했으나 결과는 좌파가 대거 승리하면서 죠스팽이 총리가 되었고 우파가 원내 제2당으로 전락하며 시라크는 실권을 잃게 되었다.[9] 이후 프랑스 국민의회의 임기와 대통령의 임기를 맞추고, 선거 시기를 일치시켜 동거정부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2000년 프랑스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임기를 기존 7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5년간 외교에만 전념하다 2002년 대선에서 총리 시절의 경제정책에 힘 입은 죠스팽과 접전을 벌였다. 예상대로 시라크는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했는데, 좌파 후보들의 난립으로 좌파성향 유권자들의 표가 분산되면서 죠스팽이 3위로 밀려나고 극우파인 국민전선장마리 르펜이 2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하는 충격적인 결과가 벌어졌다. 결국 결선투표에선 중도파와 좌파들까지 오로지 르펜을 막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시라크에 몰표를 던지면서 압도적인 득표율(역대 최다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더 자세한건 2002 프랑스 대선 참고.) 직후 이어진 2002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도 우파 연합이 승리하여, 대통령으로서 강력한 권한을 쥐게 되었다.

여기에 여세를 몰아 3선까지 도전하고자 했으나 너무 많은 나이가 걸림돌로 작용하였다.[10] 특히나 2005년에 야심차게 밀어붙였던 유럽헌법안이 부결되면서 레임덕이 극심하게와 결국 2007년도에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이후 니콜라 사르코지 당선자에게[11] 대통령직을 넘기면서 재임 12년만에 퇴임하였다.

퇴임 후 4년만에 과거 파리 시장으로 재직 당시 측근 28명을 시청 직원인 것처럼 위장해 월급을 준 혐의로 기소돼 파리 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TF1과 유착 의혹을 받기도 했다. 1987년 TF1을 기업 부이그에게 불하하는 방식으로 민영화한 장본인이 바로 당시 총리였던 자크 시라크 본인이었기 때문. 그래서인지 TF1은 한동안 자크 시라크를 적극 지지하는 논조를 펼쳤다고 한다.

2014년 이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2014년도의 모습을 보면 이미 이 시점부터는 그렇게 건강하지 않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2.1. 사망[편집]









2019년 9월 26일 목요일에 프랑스 파리 6구에서 사망했다고 부인이 밝혔다. 프랑스 상하원에서는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대국민 특별담화를 통해 시라크 전 대통령을 '자유롭고 위대한 프랑스인'으로 추모하였다. 이외 국민연합마린 르펜,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장 뤽 멜랑숑 등 생전 그의 정적이었던 정치인들 역시 애도를 보탰다.

30일. 파리의 생 쉴피스 성당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원래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이뤄지나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이후 아직 복구 중인 상황이라 시라크 전 대통령의 자택 근처인 생 쉴피스 성당에서 국장이 치러지게 됐다.

이 날을 '국가애도의 날'로 선포했고 학교나 공공시설에서도 1분간의 추모 묵념이 진행됐다.

이날 장례식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드 하리리 레바논 총리, 빌 클린턴미국 대통령, 게르하르트 슈뢰더독일 총리 등 전현직 세계 정상들도 참석했다.

유해는 지난 2016년 사망한 딸 로랑스가 묻혀 있는 파리 남부 몽파르나스 묘지에 가족장 형식으로 안장된다.

사망 이후 평가가 높아지고 있는 편인데, 후임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고만고만하게 평가가 좋지 않은 탓[12]에 프랑스 정치권의 마지막 거인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키도 크다.

3. 기타[편집]


러시아 대조국공훈훈장 1급 수훈자이다.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는 정치적 위치가 우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보수주의자라는 본인의 말처럼 나름 반성하는 모습을 꽤 보여주었다. 물론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한 사죄는 없었지만,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무려 100년만에 공식적으로 당시 정부와 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또한 비시 정부에서 일했던 과거가 있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이 2차 대전 시기 비시 정부의 홀로코스트 사건이었던 '벨디브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정부 사과를 거부했던데 반해, 시라크는 집권하자마자 바로 '벨디브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외규장각 문제에서도 반환에 회의적이던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한국 측 요구를 무조건 수용해라고 촉구했다고 한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50주년을 태평양 핵실험으로 기념해 1996년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로 여성 편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미테랑을 저리가라 할 정도로 엄청난 여성 편력을 자랑한다. '샤워 포함 5분'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파리시장 재임 시절부터 숱한 여성들과의 염문을 뿌리는 등 역대 프랑스 대통령의 화려한 사생활 계보를 충실히 이어나갔다. 개인의 자유를 신봉하는 프랑스인들은 대통령의 사생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정적인 미테랑이 시라크의 애인을 가로챘다는 낭설도 퍼졌을 만큼 두 사람은 정계 밖에서도 치열한 대결을 벌였다. 이를 두고 혹자는 "미테랑과 시라크는 누가 더 많은 애인을 갖는지 경쟁을 벌였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 시라크는 훗날 '비밀로 간직한 애인이 많이 있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일본 문화를 좋아했다고 알려져있는데, 특히 스모굉장히 좋아하는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아예 반려견 이름을 '스모(Sumo)'라고 짓고 스모를 비하니콜라 사르코지와 말싸움을 할 정도였다.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회고하길 둘이 만날때마다 시라크가 스모와 일본 문화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그의 화려한 여성 편력과 맞물려 공교롭게도 일본인과의 사이에 혼외자가 있다는 유력한 설까지 계속 흘러 나왔다. 실제 시라크는 거액이 예치된 일본 은행 계좌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중에 이 혼외자인 딸과 함께 생활하기 위한 자금이라는 추측까지 나왔다. 한편 일본에게는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 독일을 본받으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NATO 사무총장인 영국의 조지 로버트슨(George Robertson)의 권유로 해기스를 먹었고 이후 2005년 G8 정상회의에 앞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독일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난 러.독.프 정상회담에서 "영국이 유럽 농업에 기여한 것은 광우병 밖에 없다. 음식이 형편없는 나라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면서 영국 요리영국인들을 싸잡아 비난해 버리는 심각한 외교적 결례를 저지른 바 있다.[13] 이 당시 영국이 유럽연합(EU) 헌법, 예산안, 공동 농업정책, 이라크 전쟁, 2012 올림픽 유치 등 주요 현안에서 사사건건 프랑스의 발목을 잡고 있어 불편한 심기를 표출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당연히 영국인들과 영국 언론은 그의 발언을 크게 비난했다. 이것도 모자라 동시에 "핀란드 다음으로 영국 음식이 형편없다"고 발언해 가만히 있던 핀란드의 어그로를 끌기도 했다.

4. 소속 정당[편집]


소속기간비고

? - 1962-
1962 - 1968-
1968 - 1976-
1976 - 2002-
2002 - 2007-


5. 선거 이력[편집]


연도선거 종류선거구소속 정당1차 득표수 (득표율)2차 득표수 (득표율)당선 여부비고
1967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코레즈 3구15,289 (42.81%)18,522 (50.74%)당선 (1위)초선[14]
1968프랑스 국민의회 선거19,593 (54.37%)-당선 (1위)재선[15]
1973프랑스 국민의회 선거19,667 (51.73%)당선 (1위)3선[16]
1977프랑스 지방 선거파리222,395 (26.12%)394,628 (49.54%)당선 (1위)초선
1978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코레즈 3구23,616 (54.29%)-당선 (1위)4선
1981프랑스 대통령 선거프랑스5,225,848 (18.00%)낙선[17]
1981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코레즈 3구20,466 (50.60%)당선 (1위)5선
1983프랑스 지방 선거파리526,101 (61.59%)68,525 (51.65%)당선 (1위)재선
1986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코레즈???-[18]당선 (1번)6선
1988프랑스 대통령 선거프랑스6,063,514 (19.94%)14,218,970 (45.98%)낙선 (2위)[19]
1988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코레즈 3구27,375 (58.05%)-당선 (1위)7선
1989프랑스 지방 선거파리369,231 (53.60%)169,625 (51.35%)당선 (1위)3선
1993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코레즈 3구25,951 (60.68%)-당선 (1위)8선
1995프랑스 대통령 선거프랑스6,348,375 (20.84%)15,763,027 (52.64%)당선 (1위)초선[20]
2002프랑스 대통령 선거5,665,855 (19.88%)25,537,956 (82.21%)당선 (1위)재선

보다보면 국회의원(하원)과 파리시장 경력이 동시에 적혀있는데, 이는 한때 프랑스에선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겸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총리직도 겸임이 가능해서 1986년엔 프랑스의 하원의원 겸 파리시장 겸 국무총리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지금은 법 개정으로 겸직이 불가능하다.[21]

6. 둘러보기[편집]




[1] 동거정부[2] 안도라 공동 영주 겸임.[3] 좌우파를 막론하고 프랑스 정치인들의 전형적인 코스이다. 그랑제콜 인맥들의 고위직 독점과 엘리트주의는 프랑스 내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4] 반대로 전임 대통령(이자 시라크가 총리 시절 상관)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은 젋었을 적엔 극우였다가 후에 좌파로 전향하였다.[5] 하기야 미테랑의 경우도 좌파 정치인이었지만, 핵실험을 반대하는 그린피스 선단을 공격시켜 사망자까지 나오게 하는 등 우파적인 면모도 있었다.[6] 그 이전까지는 파리시장직이 오랜 시간 동안 폐지된 상태였다.[7] 미테랑은 본인은 (상대적으로 사고 날 일이 적고 본인의 권한 내에 있는) 외정 관련에만 집중하면서 이미지를 관리했고, 내정 관련으로는 시라크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하게 두어서 안 좋은 건 시라크에게 죄다 떠민 측면도 있었다.[8] 시라크도 산전수전 다 겪은 구렁이과 정치인이었다지만, 미테랑에겐 유독 약했다. 1988년 대선 당시에도 TV 토론장에서 기선 제압을 하겠다고 "지금 우리는 대통령과 총리가 아닙니다. 당신과 나는 대등한 후보로 이 자리에 나와서 유권자들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을 미테랑 씨로 부르겠습니다."라고 선빵을 날렸다가 미테랑이 당신 말이 맞소, 총리!(Vous avez tout à fait raison M. le Premier Ministre)라고 반격하는 바람에 본전도 못 찾은 게 대표적.[9] 이런 상황은 프랑수아 미테랑 시절부터 문제가 되어왔는데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때까지만 해도 항상 보수쪽에서 대통령과 의석과반을 동시에 차지해 문제가 없었으나, 1986년에 처음으로 좌파 대통령 미테랑과 우파 총리 시라크로 이루어진 좌우동거 정부가 탄생하게 되면서 정치계의 고민이 깊어졌다. 미테랑은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회당 중진을 총리로 임명하려 했지만, 문제는 여소야대라는 특성상 범우파가 불신임안을 던지면 삼일천하로 끝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테랑은 우파 시라크를 총리로 임명했고, 각료 선임을 비롯한 내치의 전권을 시라크에게 넘겨주었지만, 핵발사권 등 군사, 외교 분야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 선언하면서 국방장관와 외무장관의 임명권을 행사했다. 이후 이것이 일종의 규칙이 되었다.[10] 임기 말에는 고령으로 인해 보청기를 착용한다는 현지 보도가 나왔는데, 대통령실에서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만큼 고령에 의한 건강 관련 우려가 많았다.[11] 원래는 시라크의 정치적 제자였으나, 1995년 대선에서 에두아르 발라뒤르 후보를 지지하면서 시라크의 눈밖에 났고, 1997년 총선에서 낙선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후 시라크의 영원한 오른팔 알랭 쥐페 전 총리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선거권을 박탈당하면서 어부지리로 UDF 후보 자리를 따냈지만, 시라크는 1995년의 배신감이 가시지 않았는지 이후에도 2012년 대선에서는 프랑수아 올랑드, 2017년 대선에서는 에마뉘엘 마크롱 지지를 선언하며 대놓고 사르코지를 골탕먹였다.[12] 니콜라 사르코지는 부패, 프랑수아 올랑드는 무능으로 재선 도전에 실패했고, 에마뉘엘 마크롱은 극우 진영의 집권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중도좌·우파의 선택받아 재선에 성공했지만 국민적 인기는 높지 않다.[13] 물론 이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마이크가 꺼진 줄알고 저지른 일종의 뒷담화였으나 마이크가 켜져있는 바람에 그대로 언론에 노출이 되고 말았다.[14] 1967. 5. 7. 고용담당 장관 임명으로 사퇴[15] 1968. 8. 12. 장관 임명으로 사퇴[16] 1973. 5. 6. 장관 임명으로 사퇴[17] 1차 투표 3위[18] 비례대표제[19] 1차 투표 2위, 2차 투표 2위[20] 1차 투표 2위, 2차 투표 1위[21] 국회의원-총리직 겸임은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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